나에게는 사랑이 없는 걸까? 오늘 날짜 2025.1.21. 화
오늘의 날씨 나폴리에서 마지막 날을 보냈어.
짐을 싸느라 바깥의 날씨를 거의 느끼지 못했지만 비가 내리고 기온이 꽤 올랐어!
그간 히트텍과 목도리를 두르고 다녔는데 마지막 날이 가장 따뜻하네?
좋은 날씨를 잘 보내다가 가게 되었어.
오늘의 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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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치한 로맨스
가치는 상대적이야.
모든 것이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면 가치가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해.
나는 꽤나 미련이 없는 사람이야.
누군가 나와의 관계를 그만두고자 한다면 이유를 묻지 않고, 아쉽다든가, 그립다든가 하는 감정도 없이 다음날을 살아갈 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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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사랑이 없는 걸까?
가장 고귀한 가치를 사랑과 애정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가까운 이들에게 특별한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과연 내가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양일까?
사랑에 여러 형태가 있음은 분명하기에 이런 마음도 사랑이라고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내가 그들을 애정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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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
나는 이를 가장 숭고한 가치로 여겨.
평등해야 하는 이유는?
내가 불평등, 차별의 상황에 놓이지 않기 위해서 모두가 평등하자고 말해.
이기적인 것인가? 공감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불안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사랑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내가 그 상황에 있지 않음에 감사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아도 사랑하는 사람이 괴롭다면 나는 괴로울 것인가? 괴롭지 않은 나는 사랑이 없는 것일까? 나보다 당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게 이기적인 마음일까? 나를 내어주고서라도 당신들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극도로 이기적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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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사람은 참으로 무가치해.
모두가 소중하기에 어느 것 하나 택할 수 없거든.
이 마음은 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게 돼.
그들은 나와의 관계가 우선인 걸까, 아니면 당신들이 사랑하는 '나 자신'이 우선인 걸까?
진정한 사랑은 관계를 포기하고서라도 상대에게 가장 이로운 것, 파멸로부터 멀어지고, 종래에 그를 성장으로 이끌 선택으로 인도하고, 그것에 기여하는 것이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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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나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사람인 것일까?
사랑을 하지도 않으면서, 특별한 존재도 없으면서, 나조차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을 위해, 어쩌면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들을 찾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이, 결국 나의 욕망을 이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도 허황된 것은 아닌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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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인정할 수 있어.
나의 욕망, 이상은 이기적이야.
인류애라는 무가치성의 보편적인 사랑은 전인류를 향하고 있으나 지극히 개인적인 욕심이야.
나는 선택이 두려운 것일뿐이지.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마주하려 하지 않으려고 해왔어.
그렇기에 나는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지. 아니,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 스스로를 사랑한다고 할 만큼 자신에게 잘하려 들지 않았거든.
나를 사랑한다면, 남을, 주변을, 사랑해야 할 것 같았어.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의무고, 그 의무를 지고 싶지 않았던 거야.
선택의 무게는 너무도 무거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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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를 떠나 파리로 가는 야간버스 안에서 이 노트를 남겨.
사실 나는 겨울만 되면 몸이 극도로 약해졌어.
꾸준한 관리에도 나이지질 않으니 일을 할 때에도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동반되었어. 노력과 정성이 통하질 않으니 말이야. 그렇게 안좋은 순환이 생긴 거야. 그때마다 나는 일기를 써서 나의 상태를 보았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진단하려고 노력했지. 나는 내가 쓴 글조차도 까먹기 일쑤거든.
그렇게 카미노트가 시작되었어.
카미노트1은 순례길 일지와 동시에 내가 사고를 당하고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면서 남긴 일기와 순례길이라는 결심에서 발전한 거야.
그래서 그런지 올해의 겨울은 참 특별해.
눈을 보지도 못했고, 크게 아프지도 않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어.
누군가는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겠지만, 나는 삶 자체를 연장해가는 노력이 필요했었는데, 그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음에 감사해.
내 모든 사랑을 전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생각해.
곧 길 위에서 만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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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현상학회 - 『프랑스 철학의 위대한 시절』
그런데 바로 ‘잠’이 생각하는 사물, 즉 의식이 의식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 조건(혹은 근거)인 것이다. 깨어난 의식이기 위해서는 의식은 먼저 ‘무의식’이어야 한다. ‘깨어 있음’이라는 의식의 본성은 ‘깨어남’에서 성립하며, 깨어남은 무의식, 곧 ‘자고 있음’을 전제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 없는 까닭이다. 요컨대 잠을 거쳐야만 의식은 비로소 의식으로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의 탄생은 ‘자기동일성’의 관점에서 살펴볼 때 의미가 보다 분명해진다. “익명적 존재 속에 하나의 존재자가 자리 잡기 위해서는 자기를 떠났다가 다시 자기에게로 회귀하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즉 자기동일성의 작업 자체가 가능해야 한다.” 의식이 늘 깨어 있다면, ‘깨어 있는‘ 의식으로서 자기동일성을 획득할 방법이 없다. 오로지 의식은 잠이라는 망각 혹은 무의식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올 수 있어야만 ‘깨어 있는 것’으로서 스스로가 동일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의식은 잠을 자는 능력이다.” 잠이 없는 의식(불면 상태)은 시작도 끝도 없는 익명적 존재의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결국 철학은 의식의 항구적인 각성 상태라는 기반 위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바로 의식의 사라짐과 되돌아옴의 기반인 잠으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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