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데는 없어? 오늘 날짜 2024.09.10 화
그르노블 날씨 비가 왔어! 이제르 강이 넘칠 것 같아.
오늘의 저녁 한국인 친구와 갈비!
오늘의 달 🌒 조금 있으면 추석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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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속에서 살기
,책 읽는 걸 좋아해? 영화는? 연극은?
책, 영화, 연극 중 가장 독자 혹은 관람자의 상상력이 배제되는 공간은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
아무래도 시각적으로 모든 효과를 내보여주니까, 영화를 본 뒤 원전인 책을 읽을 때엔 영화에서 연기를 했던 배우의 얼굴을 상상하게 되어 때로는 우리의 상상력을 해치기도 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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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책과 연극 중에서는 어떤 매체가 가장 관람자의 상상력을 요구할까?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나는 ‘연극’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야.
아마 책이 어떠한 시각적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그래도 자, 내 말 좀 들어봐. 아니 읽어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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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글’로 되어있기 때문에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이 내용이 어느 정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어.
우리는 작품을 읽을 때 현실에 존재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책의 내용들을 상상 속에 구현해내지만, 연극은 사람이 내 눈 앞에서 직접 연기를 하고 있어서 나의 상상과 지금 눈 앞에 수동적으로 보게 되는 현실이 결합하는 아주 복잡한 예술의 형태인 거야.
요새 「시카고」라는 뮤지컬이 엄청 인기를 끌고 있어.
이 작품에는 법정 장면, 감옥, 가정집, 댄스홀 등이 배경으로 나와.
영화에서는 진짜 세트들로 그 장소들을 구현하지만 실제 뮤지컬에서는 최소한의 소품들로 무대라는 한 공간을 다 다른 공간인 것처럼 여기게 하지. 그러한 표지들을 제공해야 해. 그리고 관객 역시 그 거짓말, 혹은 환상에 동의하는 거야. ‘이 표지는 이곳이 감옥이라는 걸 알려줘!’와 같이 말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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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의 바탕에는 학생 때 모의고사 지문에서 읽었던 희곡이 자리해.
이강백의 『파수꾼』이라는 작품인데 마을 사람들에게 늑대가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공포심을 조성하고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려던 마을대표가 나와. 주인공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채 늑대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망을 보았어. 그러다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이런 편지를 쓰게 돼.
‘이리떼는 없고 흰 구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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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때 깨달았어.
내가 희곡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은 넓은 들판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이 올려질 무대는 뒷배경은 까맣고 아주 밝은 조명으로 가득찰 실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 순간 나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배신감? 그건 아니야. 배신감보다는 인식이 갑자기 뒤엉킨 느낌.
우리는 계속 어떠한 약속과 거짓말로 환상을 지키고 있었구나.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구나.
이런 환상들은, 거짓들은 우리의 상상을 살찌우는구나. 허구와 실재가 겹쳐지던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순수했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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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과 ‘허구’, ‘상상’으로 인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던 사피엔스의 능력을 현재를 살아가는 내가 고스란히 느꼈던 순간이었어.
이 환상은 생존의 수단이었던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목숨을 보전하는 지금에도, 무엇을 위해 자꾸 허구를 찾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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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정함을 사랑해.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다정한 사람을 사랑하지. 이 사랑은 비단 이성적인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야. 내 건조한 삶에 단 한 방울의 다정이라도 떨어진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는 하지. 그 사람과 얼마나 잘 맞는지는 제쳐두고 말이야. 나는 다정함이 승리한다는 말을 믿어. 그렇기에 다정하게 행동하려 노력하고, 또 그런 다정함을 아는 사람을 놓지 못하게 되기도 해. 나라도 참 다정한 사람이야. 그렇기에 나는 자꾸 나라와의 인연의 끈을 놓지 못하고, 나라의 카미노트를 구독해서 읽고는 하는 거겠지. 그런 의미로 다시. 우리는 다정한 사람이 되자. 그래도 이 팍팍한 세상에서 우리끼리라도 서로 다정해보자. 우리는 온기를 가진 사람이니까.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이 있지. 나의 친구들은 참 다정해. 그래서 나도 다정하고 싶어. 내가 그들 한명한명에게서 느끼는 다정함을 다시금 느끼게 해주고 싶어. 다정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얼었던 마음을 녹이는 것? 봄날의 햇살? 겨울의 군고구마? 추운 날씨에 눈으로 보이는 온기는 입김이야. 그러한 온도차가, 냉랭한 현실에서 삶의 증거가 다정일까?
난 자신의 삶에 열정을 가지고 중심을 잘 잡은 뒤 자기 자신 의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해. 그런 사람들에겐 특유의 에너지가 뿜어나오고, 난 그 에너지를 받아 때때로 찾아오는 권태를 이길 수 있지. 카미노트에서도 그런 에너지가 풍겨. 그래서 네 글이 참 좋아.
사르트르는 ’지옥이란 바로 타인‘이라고 말해. 타인의 존재는 나에게 때로 가시처럼 다가와. 아니면 자연재해? 절대 피할 수 없으니. 그러나 결국 우리는 살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아.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사랑하는 것들을 찾고, 에너지를 받고. 이 글을 남긴 사람은 정말 살고 싶다는 게 느껴져. 삶의 의지, 그것을 애써 붙들려하는 사람은 왜 다들 아름다울까?
여전히 사랑은 너무 어려워. 강한 이끌림과 집착, 희생과 성장. 여러 얼굴을 하고 있는데 그냥 깊은 의미로 말고.. 잊히지 않는 사람들이라면..타고난 것보다 노력으로 이룬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은데 난 아직 그러질 못해. 외모는 변하지 않는 취향이라 새로울 필요 없고 사고가 유연한 사람을 사랑해. 그리고 친절할 수 있는 지적인 사람을 사랑해.그리고 나와 그의 관계가 특별하다고 느끼게 하는 사람을 사랑해.동성 이성 상관 없이.다르게 볼 줄 아는 사람을 사랑해.
다들 기준이 참 달라서 코멘트를 보는게 저엉말 흥미로웠어! 그리고 나의 건강을 바란다는 말을 같이 남겨줘서 정말 고마워. 사실 요 며칠간 누군가를 위로하느라 비축해뒀던 체력을 소진시켜버렸어.
프랑스어로 ’épuisé(e)에쀠제‘라고 하는데 ’재고가 소진된‘이나 ’체력이 소진된‘이라는 뜻이야. 체력은 재고가 바닥났고 전소된 것처럼 재가 되어버렸어. 오늘 레터도 반을 잘라서 두 편으로 나누어낼까 생각도 했고, 코멘트를 뒤로 미룰까도 생각해보기도 했어.
그러다가 당신의 바람이 나의 건강과 안녕이라길래 힘을 얻었어. 다시 한번 정말 고마워! 나 역시 당신의 일상에 작은 힘을 보탤 수 있길!
어느 날에는 한국인들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제일 어린 학생이 프랑스에 먼저 체류하기 시작한 친구들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어.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굳이 꿈을 짓밟지는 말라고 말했는데 다른 한 친구는 그게 깨졌을 때의 절망이 더 크니 미리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어.
이 레터는 그 순간 생겨났어.
환상 속에서, 꿈 속에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안녕, 눈을 뜬 몽상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어?
😎
✨카미노트에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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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정원 - 「공간에서」 중,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극장이라는 공간은 오묘하다. 실시간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가상의 세계를 만나러 우리는 그곳에 간다. 몇 시간짜리 허구를 기꺼이 함께 용인하는, 약속이 이루어지는 곳. 지구 위에는 내가 사랑하는 극장들이 몇 있고, 사랑을 촉발시킨 것은 대체로 거기서 마주한 허구의 세계였다. 나는 아름다운 가상을 만난 곳에서, 그 공간을 또한 아름답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모든 가상은 실제의 공간 속에 기입됨으로써만 관객과 만나게 된다. 적어도 지금껏 공연예술이라 일컬어진 것들의 역사는 저 질서를 파기한 적 없다. 피터 브룩이라는 연출가는 그의 저서 『빈 공간』에서 누군가 그곳을 가로지르고, 누군가 그를 지켜본다면, 모든 공간은 극장이 될 수 있다고 썼다. 요컨대 무대가 성립되려면 최소한, 한 명의 배우와 한 명의 관객이 필요하며, 그들의 현전이 파문을 일으킬, 공간이 필요하다.
이때 공간이란 어떤 종류여도 관계없다고 브룩은 덧붙였지만. 나는 언제고 궁금했다. 모든 빈 공간은 어떤 모양으로 비어 있는가. 세상에 같은 공간은 없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고유하게 만날 것인데. 거기 어떤 모퉁이가 있어, 당신은 어디로 들어오고, 나는 어디를 응시할 것인가. 빈 공간은 다시 또 어떤 빈 공간들로 나뉘고, 당신은 어디서 넘어질 것인가. 우리는 어떻게 접힐 것인가. 당신의 춤은 어디까지 달려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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