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의 『이방인』 아니다? 오늘 날짜 2024.11.6 수
오늘의 날씨 학교에 난방이 시작됐어! 여기는 라디에이터로 난방을 해.
오늘의 간식 같은 반 친구가 준 초콜릿 마시멜로우
오늘의 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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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 살아가기
누군가는 낯선 사람에게 더 친절한 것 같아.
는/은 어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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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어떤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가 거의 무시를 당한 적이 여러 번 있었어.
근데 내가 다른 친구들과 있을 때에도 내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거야.
그래서 나와 함께 있던 친구들마저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안 좋아졌어.
그런데 어느 날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랑은 너무도 화사하게 웃으면서 곧잘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어.
왜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더욱 친절할까? 아니, 왜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더욱 친절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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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그 사람에게 백지를 제공하는 것과 같겠지. 선입견도 없고, 편견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나를 보고 있는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MBTI를 알게 되고, 그 사람의 배경을 알게 된다면, 우리 안에는 조금씩(물론 나를 보고 있는 그 사람 역시) 그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와 이미지들이 쌓여 가면서 내가 내재화시킨 그 사람이 우리의 인식에 존재하게 돼. 그럼 그 사람은 더이상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인식하는 방식으로서만 내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버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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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건 우리의 인식체계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할 수는 없어.
그렇지만 동시에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지.
과연 다른 사람들은 ‘나’를 ‘나’로서 봐줄까?
아니지. 우리의 존재가 타인의 세계에 들어선 순간, 그 찰나부터 타인의 눈에 비친 ‘나’는 나만의 내가 아니야. 타인에게 있어서는 그들에게 보여지는 것들을 토대로 안보이는 것들을 짐작하는, 마치 스크린으로만 본 코알라나 기린과 같은 존재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보다 보면, 코알라도 별거 없이 다른 여타 동물들처럼 풀을 먹고, 잠을 자고, 무리를 이룬다는 걸 알게 되면, 그렇게 타인에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파악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코알라를 코알라로 볼 수 없게 돼. 그저 ‘포유류’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고 그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는, 그런 한 개체로 전락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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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주체에서 ‘객체로의 전락’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거야.
그 지경에 이르게 된 ‘객체화된 나’는 마치 주체로서의 죽음을 선고받은 것과 다름 없거든.
그러니 아직 누군가의 방식으로 탐구되지 않은 ‘나’, 즉 낯선 존재인 이방인으로서의 ‘나’는 어디서든 그 존재가 ‘낯선 것’으로 용인되는 상태에 머무를 수 있어. 특히나 내가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는다면, 더욱 그러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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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낯선 사람에게 약한 걸까?
온전한 백지를 만나고 싶어하는 걸까?
온전한 백지를 만나 우리 역시 순수해지고 싶은 걸까?
아니면 타인이 우리를 순수한 우리로 바라봐주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곳은, 새로운 곳은, 새로운 타인은, 이방인이 되는 것은, 하나의 낙원인걸까?
전락을 피해 도망간, 내가 잠시간 타인에게도 나로서 인식될 수 있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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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에 의해 판단된, 선입견이 덧입혀진 우리는, 타인의 세계에서 더 이상 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동시에 이러한 낯섦을 향한 따스함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이라고 생각해.
이 따스함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고 있는 미래의 두려움에 대항해서 어쨌든 친절을 베풀며 다가가고자 하니까.
그 사람에게는 잘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일 수도,
과거의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나는 나의 작은 친절로 그 사람의 하루가 조금 더 윤택하기를 바라.
나에게 힘이 들지 않는 일이라면 더욱 더 해주고 싶어.
작은 칭찬 한 마디와 풍성한 리액션들에 사람들은 쉽게 마음을 내어 줘.
이렇게 약하고 여린 존재가 우리, 인간이야.
사랑 받고 싶어하고, 하고 싶어하는, 이방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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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라. 내가 느끼는 재미는 어디서 올까. 나는 사실 이게 행복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 나에게 재미, 원초적 즐거움은 행복과 마찬가지거든. 물론 네가 얘기하는 "재미"는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좋아하는 예능을 볼 때? 여러 번 다시 읽고, 봐도 웃음이 나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음. 행복과 구분해 생각하려니 이정도만 생각이 나네. ㅎㅎ
💙그래서인지 나는 사람들이 말하는 ‘재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 웃음이 나오는 무언가를 계속 보고 있는 것도 가끔 이해가 가지 않을 때도 있어. 이것도 내가 어떠한 감정들을 절제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모르겠어. 나는 스스로가 이성적인 편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 되게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느끼는 바에도 솔직하고. 그런데 재미라…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있지만 웃기 위하거나, 행복을 위해 그것을 일부러 찾으려고는 하지 않는 것 같아. 내게는 이게 조금 쾌락처럼 느껴지거든? 그리고 쾌락이나 도파민 터지는 일들은…부차적이라고 해야 하나? 꼭 삶에서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뒤로 미뤄두는 것 같아!
누군가 예전에 내게 그런 말을 했어.
나한테 도움되지도 않을 사람은 챙기지 말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나 더 다정다감하게 굴라고.
돌아보면 나 역시도 낯선 사람에게 쉽게 호의를 주는 편이었어. 지금도 크게 다른 것 같지 않고.
누군가에겐 그런 내 모습이, 자신을 챙기지 않고 남들에게만 헌신적으로 구는 것 같이 보여 답답했나 봐.
하지만 나는 그게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왔던터라, 온 세상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었지.
그럼에도 이렇게 사랑할래!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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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 - 「사랑은 가도」,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친절심’이라는 말이 있다. 운치 있는 말이지만 외국어로는 옮기기 어렵다. ‘그는 친절하다’라는 표현과 ‘그에게는 친절심이 있다’ 라는 표현의 차이를 외국인에게 설명하려 했지만, 제대로 못한 적이 있다. 알기 쉽게 설명해도 “좀 다른걸” 싶은 뉘앙스의 차이가 남는다.
(...)
친절심이라는 말을 들으면 생각나는 이가 있는데, 아를랑 윌리엄스라는 미국사람이다. 직업은 은행 감사관으로 마흔여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까지 영웅 같은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글을 쓸 때는 되도록 독자에게 친절해야지, 하고 없는 지혜를 짜 힘을 다하고 있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 때 친절심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되도록이면 상대가 읽기 쉬우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써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 시도해보면 알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알기 쉬운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생각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거기에 맞는 적절한 말을 골라야 한다. 시간도 들고 품도 든다. 얼마간의 재능도 필요하다. 적당한 곳에서 “그만 됐어”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나는 윌리엄스 씨를 생각한다. 맹렬한 눈보라 속, 얼음 섞인 포토맥 강에 잠기면서 주위 여성에게 “먼저 가세요”라는 말을 계속하는 친절심에 비하면 책상 앞에서 팔짱을 끼고 바른 말을 찾는 것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에 ‘사랑은 가도 친절은 남는다’는 말이 있다. 이것도 아주 멋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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